[제383호] 극한 갈등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24.12.30 | 조회수: 64

 

 

                     [제383호] 2024년 12월 30

 

                발행인: 가상준  편집인: 임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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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쟁해결 칼럼


극한 갈등으로부터 빠져나오기

김학린 교수(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  

  


  갈등은 역사적으로 모든 지역사회나 공동체에 상존해 온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임계점을 넘어선 극단적인 갈등은 지역사회나 공동체의 존립이나 안정을 해치는 심각한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특히, 장기 미해결 만성 갈등(protracted conflict)은 지역사회나 공동체를 근본적 분열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임계점을 넘어선 극단적 갈등(이하 극한 갈등, high conflict)에 대한 합리적 관리는 공동체의 안정과 발전의 필수적 요소라 할 것이다. 


  통상, 갈등이 미해결된 채로 장기간 지속되면 극한 갈등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극한 갈등은 공동체 구성원 간 특정 쟁점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구도가 뚜렷이 형성되어, ‘우리’와 ‘그들’ 간의 (심지어는 ‘선’과 ‘악’의) 대결로 치닫게 되는 갈등을 말한다. 극한 갈등 상황에서는 갈등 쟁점의 복잡한 서사는 설 자리는 잃어버리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쟁점에 대한 실질적인 견해 차이는 뒷전으로 밀리고 싸우기 위해 싸우는 갈등 그 자체가 새로운 현실이 된다. 극한 갈등 상황에서 갈등 당사자들은 통상 상대방을 비난하고, 전체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사고방식에 지배되며, 관리되지 않은 감정을 쉽게 표출하며, 심지어는 상대를 협박하거나 위협하기도 한다. 


  결국, 문제해결의 열쇠를 쥔 사안의 복잡성은 갈등해결의 장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진영 대결만 남게 되고, 궁극적으로 힘과 의지에 기반한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승/패적 갈등해소가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패자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승리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극한 갈등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세계 곳곳에서 시도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시도가 보스톤의 ‘적과의 대화(Talking with the Enemy)’ 사례이다. 보스톤은 미국에서 가톨릭 교인이 가장 많은 도시(전체 인구의 약 36%) 중의 하나인 반면, 낙태 찬성론자들도 여타의 도시에 비해 강한 도시이다. 보스톤에서는 19세기 말부터 낙태 찬성과 반대 진영이 오랫동안 적대감을 보이며 싸워왔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낙태를 둘러싼 긴장감이 정점에 달했다(거의 매주 찬반시위가 낙태 클리닉 앞에서 이어졌다). 급기야 1994년 12월 30일, 낙태 반대론자인 한 청년이 낙태 클리닉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했고 이어 또 다른 클리닉으로 이동하여 총을 쏴, 총 2명의 여성이 죽고 5명의 여성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보스톤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지역사회는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었다(주지사와 교구의 추기경이 ‘공통토론’을 제안했지만, 제안에 그쳤다). 


  그런데 6년 후 놀랄만할 일이 발생했는데, 2002년 1월 28일 6명의 지역 리더가 공동명의로 지역의 유력 신문인 <보스톤 글로브>에 ‘적과의 대화’라는 제목의 기고를 했다. ‘적과의 대화’는 1994년 총기 사건 이후 5년 6개월간 진행한 비공개 토론 과정을 진솔하게 설명한 것으로, 6명의 참가자는 낙태 찬성(3명)과 반대(3명)를 대표해 온 지역의 여성 리더였다. 토론 과정이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첫 만남을 갖기 전 낙태 반대 참여자 3명이 따로 모여 ‘악한 여자들과 함께 앉은 죄’에 대한 용서와 보호를 위해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기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놀라운 결과를 보고하였다. 

  ① 장기간 토론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낙태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양극화되었다(“각자 더 깊은 확신이 자리 잡았다”). 

  ② 도덕적,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의 관계는 훨씬 가까워졌다(“서로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다.”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았다”). 

  ③ 낙태에 관한 각 진영의 입장에 내재된 복잡성, 상충 관계, 모순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그들의 주장에 다가가는 방법을 배웠다”). 


  기고문은 보스톤 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는데, 지역사회의 뜨거운 요청으로 이들은 공개적인 기자회견까지 하게 되었다. 많은 지지와 감사를 표하는 메일과 댓글이 쏟아졌는데, “여러분이 용기를 내 그러한 일을 한 것처럼 나도 어머니께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등 이었다. 기자회견 이후 미국 사회에서 낙태 논쟁은 계속되었으나, 보스톤 지역사회에서 논쟁의 폭력성과 독설은 많이 진정되었다. 갈등의 가장 위험한 국면에서 빠져나오는 출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극한 갈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지역사회 공동체의 다양한 시도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교훈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극한 갈등이 갖고 있는 특성(공동체 구성원 간 특정 쟁점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구도가 뚜렷이 형성되어, ‘우리’와 ‘그들’ 간의 대결로 치닫게 되는 갈등 상황)을 해체 또는 전환하기 위한 시도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목적의식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갈등 당사자들을 찬성과 반대라는 획일적 입장에 가두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들이 모색될 수 있다. 첫째, 정보(특히, 새로운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여 당사자들이 선택의 폭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찬성과 반대라는 단순한 양자구도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사회 공동체 의식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해야 하는바, 지금까지 소외되어 온(목소리를 강하지 내지 않은) 다양한 집단의 의견이 최대한 노출되도록 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진 새로운 목소리(집단)를 발굴해야 한다. 셋째, 찬성과 반대라는 입장의 차이를 완화하기 위한 진영 간 직접적인 대화 노력도 필수적이다. 양자 간 차이점 뿐만 아니라 공통점도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양자 간 깊고 지속적인 대화의 장이 설계되고 실행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입장이 아닌 입장 이면에 존재하는 속사정(관심사)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이벤트가 아닌 지속성과 책임성이 담보되는 ‘시민모임’ 또는 ‘반공식적 대화 모임’을 다양한 층위에서 구성하여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사안의 복잡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다. 과도한 단순화는 성급한 판단, 선입견, 오해, 비인간화, 결함있는 의사결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신중하고 의도적이고 잘 조율된 프로세스가 필요하며 용기있고 영향력있는 지역사회 리더들이 프로세스에 참여해 오랫동안 인내심을 발휘해 지역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총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섯째, 다양한 층위의 완충장치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완충장치 참석자들은 모두가 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자리에 온 이유가 서로를 이해하러 왔지, 친구가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섣불리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다양한 완충장치를 개발하여 찬/반 극한 대립을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극한 갈등으로 진입해 출구를 좀처럼 찾지 못한 사례들이 종종 목격되고 있다. 극한 갈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진지하게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할 것이다. 사실 극한 갈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표준화된 방법은 없다. 갈등 상황과 특성에 따른 창의적 방법의 개발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한 갈등에서 탈출하는 첫걸음은 차이를 이해하고 이에 근거한 통합적 해법을 모색하는 것인바, 사회구성원의 시민의식을 최대한 고양하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여 총력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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