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준 교수(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분쟁해결연구센터 소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서 추진하는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관련해, 최근 일부 정치권을 중심으로 새만금 이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논의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갈등,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오랜 정책 과제, 그리고 전력 공급을 둘러싼 불균형 문제를 명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도권 집중 완화는 한국 사회가 외면할 수 없는 구조적 과제다. 전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지역으로 산업을 분산하자는 논리 또한 표면적으로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갈등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해당 주장은 국가 전략 산업이 처한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지역 간 제로섬 경쟁만을 자극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첨단 반도체 산업은 단순히 공장 부지와 전기만 있으면 작동하는 장치 산업이 아니다. 고급 연구 인력의 집적, 글로벌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과의 긴밀한 네트워크, 실시간 협력이 가능한 연구개발 생태계가 핵심 조건이다. 이미 상당 부분 공사가 진행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이러한 생태계적 요건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이를 정치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반도체 산업의 본질을 외면한 근시안적 접근에 가깝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이 논의가 등장한 시점이다. 202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기되는 ‘이전론’은 중장기 국가 전략보다는 단기 정치 일정과 표심을 의식한 주장으로 읽힐 소지가 크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선거 국면에서 상징적 구호로 소비될 경우, 정책에 대한 신뢰는 약화되고 지역 간 갈등의 골만 깊어질 가능성이 높다.
시야를 국내에만 한정할 여유도 없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국가 간 경쟁의 전면에 서 있다. 도널드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미국 정치권은 보조금과 관세를 무기로 반도체 생산 시설의 자국 이전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정치권마저 반도체 클러스터의 입지 불확실성을 키운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마주할 선택지는 새만금이 아니라 미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두 기업에 대해 미국의 압력에 응할 수 있는 명분을 국내 정치가 스스로 제공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정한 지역균형발전은 이미 진행 중인 국가 핵심 사업을 정치적 논리로 흔드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비수도권이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장기적이고 정교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예컨대 호남 지역의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 산업단지로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전력망 확충, 혹은 지역 특성에 맞는 제2·제3의 전략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접근이 훨씬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일 수 있다.
지금 한국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아니라, 인공지능 시대의 글로벌 경쟁 속에서 흔들림 없이 싸울 수 있는 일관된 정책 환경이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미래와 생존이 걸린 전략적 보루로 다루어져야 한다.